봄은 시나브로 다가온다.
차가운 바람이 누그러지고, 코끝에 닿는 공기의 향이 달라질 때쯤,
도시의 어느 골목에서도 봄은 제 존재를 잔잔히 드러낸다.
며칠 전, 친구와 저녁을 먹기 위해 거여동으로 향했다.
평소 자주 다니던 거리였지만, 그날따라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이 있었다.
길가에 놓인 화분들, 그 안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유난히 생생하게 보였다.
꽃집 가판대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여인네 나들이 치장처럼 피어 있었다.
진홍색 버베나, 자주색 로벨리아, 그리고 주황빛 한련화가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아침 인사처럼 생기 있었고,
화분 옆에는 작은 둥근 잎사귀들이 봄기운을 머금은 듯 생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꽃빛의 매혹에 빠져 한참을 서성였다.
저녁 식사 메뉴는 생선구이를 시켰다.
식사를 하며 짭짤한 구이처럼 정치 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몇 잔의 소주를 곁들였다.
식사를 마치고서 친구 집까지 걸어가는 길목에
또 하나의 봄이 나를 멈춰 세웠다.
담벼락 위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개나리.
마치 노란 레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흑인 여인처럼 늘어진 그 모습은,
지나치기에는 내 호기심을 너무도 자극하고 있었다.
한참을 레게머리 같은 진달래 흐드러짐을 감상하고 걷다 보니,
어느 주택의 창문 아래 피어난 개나리는
담벼락의 살구빛 색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잡지 속표지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길,
오금공원 근처 울타리에도 개나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노란색은 어디서든 봄의 가장 선명한 언어였다.
그 자체로 경계를 긋지 않지만,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울타리 같았다.
돌아오는 길, 세륜중학교 담벼락 너머로 벚꽃이 보였다.
달빛이 스며든 꽃잎은 마치 ‘고결함’ 그 자체였다.
조명도 아니고, 인위적인 연출도 아닌
그저 자연의 조화 속에서 피어난 고요한 광채.
나는 그 벚꽃이, 잠시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 집 바로 옆 성당 담벼락.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피어난 흰 목련은
달빛을 받아 더욱 순백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 자태는 조용했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밤의 고요함과 어우러진 그 흰빛은
도시 한복판에 피어난 어떤 성스러움처럼 느껴졌다.
도시는 바쁘다.
길 위의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건물도, 차도, 전선도, 우리 사는 모습처럼 얽히고설켜 있지만
그 속에서도 꽃들은 말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건 봄이 우리 곁에 있다는 뜻이고,
우리도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봄은 공기에서 느껴진다.
향기로 내 몸에 들어오고, 또 색으로, 온기로…
올해 봄은 특히 그렇다.
삶이 지치고 무뎌질수록,
나는 더 자주 길 위의 꽃들에게 시선을 주게 된다.
https://senior-space.tistory.com/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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