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여유

봄, 도시를 피우다 – 거여동 꽃길 산책과 저녁의 기억

만샘 2025. 4. 12. 08:07

꽃집 의꽃

 

봄은 시나브로 다가온다.
차가운 바람이 누그러지고, 코끝에 닿는 공기의 향이 달라질 때쯤,
도시의 어느 골목에서도 봄은 제 존재를 잔잔히 드러낸다.

 

며칠 전, 친구와 저녁을 먹기 위해 거여동으로 향했다.
평소 자주 다니던 거리였지만, 그날따라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이 있었다.
길가에 놓인 화분들, 그 안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유난히 생생하게 보였다.

 

 

꽃집 가판대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여인네 나들이 치장처럼  피어있다.

 

 

꽃집 가판대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여인네 나들이 치장처럼 피어 있었다.
진홍색 버베나, 자주색 로벨리아, 그리고 주황빛 한련화가 저녁이 다 되었는데도
아침 인사처럼 생기 있었고,
화분 옆에는 작은 둥근 잎사귀들이 봄기운을 머금은 듯 생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꽃빛의 매혹에 빠져 한참을 서성였다.

저녁 식사 메뉴는 생선구이를 시켰다.
식사를 하며 짭짤한 구이처럼 정치 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몇 잔의 소주를 곁들였다.

 

 

개나리가 마치 노란 레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흑인 여인처럼  늘어진 그 모습

 

 

식사를 마치고서 친구 집까지 걸어가는 길목에
또 하나의 봄이 나를 멈춰 세웠다.
담벼락 위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개나리.
마치 노란 레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흑인 여인처럼 늘어진 그 모습은,
지나치기에는 내 호기심을 너무도 자극하고 있었다.

 

한참을 레게머리 같은 진달래 흐드러짐을 감상하고 걷다 보니,
어느 주택의 창문 아래 피어난 개나리
담벼락의 살구빛 색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잡지 속표지처럼 느껴졌다.

 

 

창문아래 울타리에도 개나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길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길,
오금공원 근처 울타리에도 개나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노란색은 어디서든 봄의 가장 선명한 언어였다.
그 자체로 경계를 긋지 않지만,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울타리 같았다.

 

 

달빛 머금은 벚꽃은 마치 ‘고결함 ’ 그 자체였다.

 

 

돌아오는 길, 세륜중학교 담벼락 너머로 벚꽃이 보였다.
달빛이 스며든 꽃잎은 마치 ‘고결함’ 그 자체였다.
조명도 아니고, 인위적인 연출도 아닌
그저 자연의 조화 속에서 피어난 고요한 광채.
나는 그 벚꽃이, 잠시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피어난 흰 목련

 

 

그리고 내 집 바로 옆 성당 담벼락.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피어난 흰 목련
달빛을 받아 더욱 순백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 자태는 조용했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밤의 고요함과 어우러진 그 흰빛은
도시 한복판에 피어난 어떤 성스러움처럼 느껴졌다.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피어난 흰 목련

 

도시는 바쁘다.
길 위의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건물도, 차도, 전선도, 우리 사는 모습처럼 얽히고설켜 있지만
그 속에서도 꽃들은 말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건 봄이 우리 곁에 있다는 뜻이고,
우리도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봄은 공기에서 느껴진다.
향기로 내 몸에 들어오고, 또 색으로, 온기로…
올해 봄은 특히 그렇다.
삶이 지치고 무뎌질수록,
나는 더 자주 길 위의 꽃들에게 시선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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